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역대 독일 연방의회 선거 (문단 편집) === 제7대 총선 (1972) === ||<-3> 1972년 11월 19일[br]{{{-2 총원: 496석, 과반의석: 249석}}} || ||<-2><#e20019> [[빌리 브란트|{{{#fff '''브란트'''}}}]] {{{#fff '''2기'''}}} {{{#fff '''->'''}}} [[헬무트 슈미트|{{{#fff '''슈미트'''}}}]] {{{#fff '''1기 내각'''}}}[br]{{{-2 {{{#fff '''271석'''}}}}}} || 야당[br]{{{-2 225석}}} || ||<#e20019> [[독일 사회민주당|{{{#fff 사회민주당}}}]] ||<#ffed00> [[자유민주당(독일)|{{{#000 자유민주당}}}]] ||<#000000> [[CDU/CSU|{{{#fff CDU/CSU}}}]] || || 230석 || 41석 || 225석[br]{{{-2 177석+48석}}} || 브란트의 승부수가 통했고, 여러가지 천운이 따랐다. 기민련은 브란트 내각의 국경선 포기 문제, 동방정책, 경제정책을 비난하면서 승리를 자신했지만 결과는 사민당-자민당 연정이 예상밖 대승을 거두었다. 이 선거 결과로 사민당은 [[독일연방공화국]] 출범 이후 처음으로 CDU/CSU를 앞서는 의석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사실 브란트-슈미트로 이어지는 사민당 정권 13년 동안 사민당이 선거에서 CDU/CSU를 누루고 제1당이 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머지 선거에서는 전부 CDU/CSU가 제1당을 차지했지만, 사민당은 제2당임에도 불구하고 자민당과의 연정을 통해 집권을 이어갔다. 사회로 진출한 [[68혁명]] 세대가 폭발적으로 지지한 것이 큰 원동력이 되었다. 덧붙여서 중도 성향의 일부 시민들도 1971년 빌리 브란트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이후 추축국 낙인이 찍혀있던 독일의 위상을 세워준 것이 여전히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빌리 브란트 정권에 대해 우호적인 상황이었다. 이 총선의 결과로 브란트는 연임에 성공하며 승승장구하는듯 했지만 채 1년 반도 지나지 않아 [[오일쇼크]] 불황과 함께 브란트의 측근인 [[귄터 기욤 사건|귄터 기욤 간첩 사건]] 및 브란트 본인의 섹스 스캔들이 연이어 터지면서 총리에서 사임하였다. 후임으로는 같은 당내에서 브란트와 대립 포지션에 있었던 [[헬무트 슈미트]]가 총리가 되었다. 브란트가 사민당 내 강경 좌파를 대표했다면 경제학을 전공한 경제 관료 출신이었던 슈미트는 사민당 소속이라는게 의심스러울 정도로 중도를 넘어서 때로는 우파에 가까워 보이는 정책을 펴기도 했다. 브란트와 당내에서 대립하던 슈미트가 총리가 되면서 이후 내각의 방향은 크게 바뀌게 되었다. 슈미트는 사민당 내에서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비판했던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때문에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폐기는 아니지만 상당 부분 수정되었다. 또 경제 정책에 있어서도 자유주의적 성향을 띄게 되었다. 그런데 슈미트가 이렇게 우파 성향의 인물이었던 덕분에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거듭하고 있던 연정파트너 자민당과의 관계는 크게 개선되었고 이에 슈미트 내각은 의외로 안정을 유지했다. 한편 기민련에서도 세대교체가 일어나 42세의 젊은 정치인 [[헬무트 콜]]이 당수직에 오르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